무문관

흐르는 강물처럼

강병우 2016. 6. 18. 21:11

어느 스님이 말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러자 조주는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그 스님은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그럼 발우나 씻게." 그 순간 그 스님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무문관 7칙》

 

우리는 무명 스님이 경험했던 자기의 맨얼굴을 찾으려는 집요한 노력과 반복되는 절망감에 주목해야만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 우리 자신을 이 스님이 느끼고 있는 절망감 속에 던져 넣어야만 한다. 조주의 대답이 무명 스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구원의 밧줄이 될 구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절실함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내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무명 스님을 조주는 한마디의 말로 바깥으로 이끌고 있다.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스님은 맨얼굴을 찾으려는 오래된 집착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마음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서 제거하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집착이다. 불교의 가르침, 즉 불법은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불법에 집착하는 것 자체도 집착일 수밖에 없다. 질병을 고치는 약에 집착하다가 약물중독에 빠질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냐 외면이냐가 아니다. 핵심은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조주는 무명 스님의 새로운 집착마저 끊어 버리려고 했다. "그럼 발우나 씻게." 이미 먹었기에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아침 죽에 집착하는 마음마저 날려 버리려고 한 것이다. 내면이든 외면이든 집착하지 않아야 우리 마음은 '여기 그리고 지금' 활발발하게 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연주자는 관중의 시선과 평가 때문에 연주를 망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당당하게 직면할 뿐이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순간, 아니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본래면목이라는 가르침에 집착해서 내면에 침잠하는 것이나, 평상심이라는 가르침에 집착해 외부로 치닫는 것 모두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데 장애만 될 뿐이다.

 
  • 2020.12.27 22:52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순간, 아니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본연의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망쳐버리고 수습하기 어려운 늪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직장에서는 상사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걱정이 집착이요 지나친 의식일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그것이 두려워 몇날 며칠을 고민하며 보낸다. 열과 성을 다해 작성한 보고서 한 장에 대한 평가를 두려워한 결과이다. 직접 보고를 하고 나면 걱정이 사라진다. 칭찬 받건 깨지던 간에 후련해진다. 이미 일어난 일은 수습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그냥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을 갖고 흐르는 강물처럼 의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나하나 평가에 민감해지고 반응하면 깊은 늪속으로 자기 스스로를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차라리 시키면 시키는대로 따라서 하는게 답일 수 있다. 상사의 판단을 그냥 존중해주면 그만이다. 어차피 책임은 그가 질 것이다. 나의 판단이 중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럴땐 과감히 나의 판단에 집착하지 말고 따라야 한다.

    상사는 일을 평가한 것이지 나를 평가한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없다. 사람대 사람으로서 내가 꿀릴건 없다. 단지 조직과 일이라는 상관관계에 묶였을 뿐이다. 너무 상사의 반응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한 일에 당당히 책임을 지면 그 뿐이다. 칭찬을 받으면 기분은 좋은 것이고 비난을 받으면 나쁜 기분은 얼른 잊어버리고 다음 일을 준비하면 된다. 상사의 의견에 따라 조정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인간적인 비난이 이어지면 마땅히 따져야 함은 당연하다. [비밀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