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살아 내는 것 사이의 차이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앎은 도가 아니다." 《무문관 34회》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은 선종의 중요한 양대 슬로건이다. 직지인심은 외부 경전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마음에 둔다는 뜻이다. 또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서 불성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불성을 본다면 부처가 된다는 의미이다.
어떤 수행자가 자신의 맨얼굴 즉, 불성을 찾았다고 확신한다고 해도 과연 정말로 찾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은 당당한 주인으로서의 삶이란 세계 속에서 확증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깨달은 것과는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살아가는 나'와 '생각 속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선과 같은 치열한 내성을 거쳤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불성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스스로 불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남전 화상은 화두를 통해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가르침을 내린다. "너희가 붙잡았다고 자신하는 마음이 정말 부처의 마음인가? 너희가 지금 알았다고 자신하는 것이 정말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인가?"
치열한 참선 끝에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한 수행자가 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나.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타인들과 만났을 때 벌어진다.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인으로 우뚝 서 있을 때에만, 그 수행자는 자신이 실제로 부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임제의 말처럼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야" 진짜 부처이다.
당당한 주인으로서의 삶이란 세계 속에서 확증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과 실제로 부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을 잘 아는 것과 실제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
"앎은 도가 아니다." 도는 직접 걸어가야만 의미가 있는 등산길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앎이 도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부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