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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의 바다

알아차림을 바다에 비유하자면, 생각은 수면에서 움직이는 파도이며 느낌은 그 밑에서 흐르는 해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은 알아차림의 움직임이나 활동입니다. 바닷속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의 중심은 항상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따라서 마음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온함을 얻기 위해서는 알아차림의 중심으로 가라앉아야만 합니다. 파도와 해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독자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파도와 해류는 그저 물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바다의 표면에서 움직이는 파도와 그 밑에서 흐르는 해류는 그저 바닷물 자체 안에서 움직이는 형태 없는 물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각, 상상, 느낌, 감각, 지각은 단순히 알아차림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알아차림 자체일 뿐입니다...

내면으로 향하는 길

대상적 경험으로만 향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마음에게는 알아차리고 있다는 경험, 존재의 느낌, '아이엠'이라는 앎은 마음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온함과 행복으로 향하는 흔적이나 암시입니다. 처음에는 명상이 어떤 새로운 상태, 혹은 경험을 얻기 위해 마음이 행하는 어떤 활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명상이 마음의 속성, 혹은 본질 그 자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명상은 우리의 존재 방식이지,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자기로서 머무르고, '아이엠' 안에 휴식하며, 신의 존재를 실천하는 것, 이것만이 경험의 개별적인 주체인 에고를 사라지게 하는 유일한 형태의 명상이자 기도이며, 최고의 궁극적인 명상이자 기도입니다. 내재적으로 평온하며 무조건적으로 충만한 알아차림이라는 ..

애쓰지 않는 길

알아차림이 외관상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즉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을 알기 위해서, 알아차림은 스스로의 주의인 앎의 빛을 그 대상을 향해 비춰야 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앎의 빛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의 본질은 순수한 앎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며, 스스로 알며, 스스로 알아차립니다.평온함과 행복에 대한 갈망은 우리 본연의 이완된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갈망입니다. 명상은 주의의 긴장을 풀어주고, 그 결과 알아차림이 스스로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명상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상은 스스로에게 돌아가기, 또는 스스로를 쉬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

뒤엉킨 알아차림 풀어헤치기

알아차림은 마음의 형태를 통해 생각, 이미지, 느낌, 지각, 인식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형태를 통해서는 알아차림은 그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히 한정된 알아차림이 곧 마음이기 때문입니다.스크린의 활동이 영화이고, 바닷물의 활동이 해류이듯이, 알아차림의 활동이 곧 마음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알아차림이 움직이는 것이며, 알아차림은 마음이 쉬는 것입니다.마음은 무엇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알아차림을 더 가릴 뿐입니다. 명상이란 마음의 활동을 가라앉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본성이 순수한 앎, 곧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인식될 뿐입니다.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

우리 본질의 핵심을 살펴보다

공간과 마찬가지로, 알아차림 그 자체에는 대상적인 특성이나 특징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비대상성 때문에 사람들은 알아차림 그 자체를 흔히 무시하거나 간과하고는 합니다.우리는 스스로의 본질적인 모습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대신 생각, 이미지, 기억, 느낌, 감각, 지각들이 모인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알아차림의 경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지요.우리의 마음은 알아차림이 몸의 한계, 몸의 운명을 공유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몸의 속성과 한계와 혼합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개별적 자아인 에고ego가 생겨났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개별적 자아가 곧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되지요.알아차림을 숨기는 것, 놓치는 것, 멀어지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원죄'라고..

알아차림의 본질

생각이 뒤흔들리고, 감정이 고통스럽고, 몸이 아프고, 세상이 어지러워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알아차림 그 자체는 이러한 경험 중에 일어나는 그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의 본질은 평온함 그 자체입니다. 알아차림의 본질이란 행복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마음, 몸, 세계의 상태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모든 상태, 환경,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독립적이고 이유 없는 기쁨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제자들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I don't mind what happens"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상태다. 집착도 거부도 하지 않는 것이 수용이다. 어떤 것..

알아차리기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처럼 모든 대상적 경험은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알아차리는 경험은 절대로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변화하는 모든 경험 속에서 존재합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하얀 스크린은 항상 존재하듯이 말이지요. 경험하는 대상은 항상 변화하지만,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은 늘 그대로입니다.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있는 스크린은 자기 자신 위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직접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는 영화의 내용에 빠져 스크린 그 자체를 간과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험의 대상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혹은 알아차림 그 자체를 대개 간과하고 있습니다.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이 대상적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알아..

서문(스파이라) 행복의 직관

우리는 그저 다양한 대상과 물질, 행동, 마음 상태, 인간관계에서의 성취를 통해 고통이 주는 불편함을 회피하려고만 하지요. 우리는 원하는 대상이나 경험을 얻을 때마다, 혹은 불편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때마다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결핍, 탐색, 일시적인 충족이라는 무한한 순환에 중독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절망을 이럭저럭 관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신이나 스승, 만트라, 호흡 훈련 등에 집중하는 기존의 종교적, 영적 수행은 모두 대상적 경험에 불과합니다. 대상적 경험의 내용으로부터 벗어나 대상적 경험의 근간을 이루는 원천이나 본질로 마음이 향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명상이나 기도의 본질입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지속적인 평온함과 행복은 늘 우리 안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