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21장~40장

제38장 노자의 덕인은 공자의 인덕과 다르다

보명아빠 2009. 1. 18. 23:19

가장 훌륭한 덕은 덕이라고 하지 않는다. (上德不德)

그래서 덕이 있다. (是以有德)

수준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下德不失德)

그래서 덕이 없게 된다. (是以無德) 

가장 훌륭한 덕은 무위하면서

무엇을 위하여 함이 없다. (上德無爲而無以爲)

가장 훌륭한 인은 그것을 행하되

무엇을 위하여 함이 없다. (上仁爲之而無而爲)

가장 훌륭한 의는 그것을 행하면서

무엇을 위하여 한다. (上義爲之而有以爲)

가장 훌륭한 예는 그것을 행하되 따라오지 않으면 (上禮爲之而莫之應)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끌어당긴다. (側讓而後仁)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덕이고 (故失道而後德)

덕을 잃은 후에 인이며 (失德而後仁)

인을 잃은 후에 의이고 (失仁而後義)

의를 잃은 후에야 예이다. (失義而後禮)

대저 예라는 것은 (夫禮者)

진실하고도 신실한 마음이 얄팍해진 결과이며 혼란의 원인이다.

(忠信之薄, 而亂之道)

앞서 있는 인식 체계는 (前識者)

도가 꾸며진 것이자 어리석음의 단초이다. (道之華, 而愚之始)

이렇기 때문에 대장부는 중후함에 처하지 (是以大丈夫處其厚) 

얄팍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 (不居其薄)

그 참된 모습에 처하지 (處其實)

그 꾸며진 곳에 거하지 않는다. (不居其華)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故去彼取此)

 

노자는 인간이 인위적 조작으로 형성된 체계의 훈도를 받기 이전에 가지고 있는 후덕한 정서를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노자가 보기에 인위적 조작의 극치인 예는 이런 진실하고도 신실한 삶이 왜곡된 결과로 생긴 것이다.

 

효가 어떤 체계 안으로 들어와 구체적인 형식으로 규정되면 이렇게 정해진 형식을 지키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있는 진정성을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런 형식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효와 불효가 갈리게 된다. 설사 그런 형식을 지키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진정성은 효로 인정받기 어려운 형국으로 되는 것이다.

 

일단 예가 정해지면, 사람에게 관심은 그 형식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옮겨 간다. 인간은 형식화되고 진정성은 뒤로 밀려난다. 결국 그 예의 체계에 편입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으로 나뉘고, 그렇게 계층이 나뉘어진 것이 결국은 갈등의 단초로 기능하게 된다는 것이 노자의 관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따라야 할 것으로 설정되어 저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버리고, 그런 인위적 조작이 가해지기 전에 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진 이것을 취해야 한다고 노자는 말한다.

 

  • 2021.05.17 18:19

    상덕(上德)은 덕스럽지 아니하다.
    그러하므로 덕이 있다.
    하덕(下德)은 덕스러우려 애쓴다.
    그러하므로 덕이 없다.
    상덕은 함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서 함이 없다.
    하덕은 함이 있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한다.
    세속에서 말하는 상인(上仁)은
    함이 있으되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하지는 않는다.
    상의(上義)는 함이 있으며 또 무엇을 가지고서 할려고 한다.
    상례(上禮)는 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응하지 않으면
    팔뚝을 낚아 억지로 끌어당겨 복속시킨다.
    그러므로 도를 잃어버린 후에나 덕을 얻는 것이요,
    덕을 잃어버린 후에나 인을 얻는 것이요,
    인을 잃어버린 후에나 의를 얻는 것이요,
    의를 잃어버린 후에나 예를 얻는 것이다.
    대저 예법이란 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신뢰의 엷음이요
    모든 어지러움의 머리다.
    시대를 앞서간다 자처하는 자들이야말로
    도의 허황된 꽃이요 모든 어리석음의 시단이다.
    그러하므로 어른스러운 큰 덕의 사람은
    그 도타움에 처하지 그 엷음에 살지 아니한다.
    그 열매에 처하며 그 꽃에 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 2021.06.01 15:51

    지극히 높은 덕은 인위의 덕이 아니며,

    인위의 덕이 아니어서 덕이 된다.

    지극히 낮은 덕은 덕을 행했다고 들추어내 덕이 없어진다.
    지극히 낮은 덕은 베풀되 바라는 바가 있어서 베푸는 꼴이다.
    높은 인은 하되 무심히 하고,

    높은 의는 하되 바라는 바대로 하며,

    높은 예는 행하되 응하지 않으면 팔을 휘둘러서라도 행하게 한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 덕을 부르짖게 됨이요,

    덕을 잃은 뒤에 인을 주장하게 된 것이고,

    인을 잃은 뒤에 의를 앞세우게 된 것이며,

    의를 잃은 뒤에 예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예라는 것은 충성과 믿음이 얄팍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꼬투리가 되며,

    지식을 앞세우는 것은 자연의 도를 인위의 도로 꾸며 어리석음이 시작된다.
    이러하므로 대장부는 수수하고 꾸밈없이 넉넉하게 살고,

    얄팍한 잔꾀 따위에 머물지 않으며,

    겉과 속이 한결같아 진실하게 살고,

    겉보기만 화사한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얄팍하고 꾸민 것을 떨쳐버리고

    수수하고 꾸밈없는 것과 표리가 한결같은 진실을 취한다.

    ※ 인간은 잘해 줄 때는 입 안의 사탕처럼 달다고 하고 잘 못해 줄 때면 입 안의 소태처럼 쓰다고 하면서 사물을 자기중심으로 보려고 한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천지를 바라보며 만물을 저울질하는 버릇을 노자나 장자는 문화라고 했다. 상덕上德은 한없이 베풀어 줄 뿐 목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