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41장~60장

제50장 왜 목숨을 소중히 해야 하는가

강병우 2010. 8. 9. 22:20

사는 길을 떠나 죽는 길로 들어서는구나. (出生入死)

삶의 부류가 열에 셋이고, (生之徒, 十有三)

죽음의 부류가 열에 셋이다. (死之徒, 十有三)

그런데 사람들은 사는 일에만 더욱 열중하지만, (而民生生)

하는 일마다 모두 죽는 길로 가는 것이 또 열에 셋이구나.

(動皆之死地之十有三)

왜 그런가?  (夫何故?)

지나치게 삶을 좋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以其生生)

듣자하니 삶을 잘 기른 사람들은 (蓋聞, 善攝生者)

험한 산길을 가면서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陸行 不遇豺虎)

군대로 가더라도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는다. (入軍不被甲兵) 

코뿔소는 그 뿔을 박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발톱을 쓸 곳이 없으며

적군은 칼을 겨눌 곳이 없다.

왜 그런가? (夫何故?)

죽음에 이르는 여지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以其無死地)

 

  • 2021.05.17 20:18

    삶의 자리에서 나오면
    죽음의 자리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삶의 무리가 열에 셋이 있다면,
    죽음의 무리도 열에 셋이 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도 (人之生)
    죽음의 땅으로 가고 있는 자들 또한 열에 셋이 있다. (動之死地, 亦十有三)
    대저 웬 까닭인가?
    너무도 후하게 살려고 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대저 듣건데,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뭍으로 다녀도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지 아니하고,
    군대를 들어가도
    갑옷을 입거나 병기를 차지 아니한다.
    코뿔소가 그 뿔을 들이댈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내밀 곳이 없고,
    병기가 그 칼날을 내리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대저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그 죽음의 자리가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 2021.06.01 20:03

    나오는 것이 생이요,

    들어가는 것은 사이다.
    살아가는 무리에는 열에 셋이 더 있으며,

    죽어 가는 무리에도 열에 셋이 더 있고,

    인간의 삶이 움직여 죽음의 곳으로 가는 것에도 역시 열에 셋이 더 있다.
    왜 그런 것인가?

    그렇게 살아서 사는 일을 후하게 하는 까닭이다.
    내가 들어본 바로는,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것이라 생각하고 잘 지키는 자가

    육지에 나가서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으며,

    전쟁터에 가서도 복병에게 피습을 당하지 않고,

    외뿔소가 제 뿔로 섭생을 잘하는 이를 받아치는 일이 없으며,

    호랑이가 발톱을 드러내 그를 할퀴는 일이 없고,

    복병은 쥐고 있는 칼날로 그를 해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섭생자에게는 죽을래야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 열에 셋은 인간의 기질인 七情과 六慾을 일컬음
    칠정은 희喜, 로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
    육욕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